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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삶이 머문 여행 2013. 1. 23. 11:45
와 보고 싶었던 청계천
이제야 찾았다. 아름다운 등축제가 있는 청계천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청계천은 많은 반대의 불구에도
과감한 밀어붙이기 정책으로 성공을 한 사업이다.
그 탄력의 자신감때문인지....4대강까지 욕심을 냈으나 결국은 환경파괴, 대기업 특혜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야 말았다.
여하튼 그건 그거고.......난 지금 청계천위에 서 있다.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구와 중구와를
관통하는 생활하천인 청계천은 길이 3,670`m. 최대 너비 84`m이다.
인왕산과 백악산의 남쪽 기슭과 남산 북쪽 기슭에서 발원해
동대문을 지나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근처에서 중랑천과 합쳐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흘러간다.
1958년 복개공사를 시작하여1960년 4월 고가도로를 건설하여 사용하였으나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청계천 도로위의 삼일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예전의 청계천으로 복원하였다.
조선시대의 청계천은
도성 주변의 산과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들이 모여 도성 한가운데를 동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도심하천이었다.
'개천(開川)'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내를 파내다'라는 뜻으로청계천이 자연하천이 아니라
생활의 필요에 의하며
어느 정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인공하천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청계천은 하천 조성과정이나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위치 상 조선왕조 500년 동안,
근대 100년 동안의 서울의 역사문화, 서울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게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청계천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들이 왕정(王政)을 펼친 정치적인 공간이었다.
조선왕조의 기틀을 잡은 제3대 태종은수도건설, 시전(市廛) 설치와 함께 개천을 정비함으로써 서울의 도시형태가 완성되었다.
제4대 세종은 개천으로 흘러 들어오는 지천을 정비하였으며, 개천에 흐르는 물의 깊이를 미리 헤아리기 위해 수표(水標)를 설치하였다.무엇보다도 개천의 성격을 도심 속의 생활하천으로
규정함으로써 이후 개천이 서울사람들의 일상생활과 함께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글자료인용; 청계천홈페이지,http://www.cheonggyecheon.or.kr)
△ 장통교(1897년)
중부 장통방에 있었으므로 장통교라고 하였다.
현재 장교동 한화빌딩 앞에 위치하였다.
장통교는 청계천 본류와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 청계천 판자집 철거(1960년)
△ 청계천변 판자촌(1965년)
△ 마장동 화재(1970년)
△ 수포교
광통교와 함께 가장 유명한 다리로 1420년(세종2)에 만들어졌다.
당시 이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 하기 위해서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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