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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국유적지에서 경덕왕(景德王)을 알현하다.•─삶이 머문 여행/경상북(慶尙北) 2013. 6. 15. 07:01
작약꽃이 아름답게 피는 의성읍 탑리.....
요즘에는 예전만큼 작약재배를 하지 않지만 한때는 엄청난 양의 작약을 재배했다.
6월의 뜨거운 태양아래 붉게 물들어가는 작약꽃은 얼마나 열정적이었던가!
지금은 작약밭이 마늘밭으로 많이 변해버렸다.
그 행복한 기억들을 쫒아 오늘은 옛 조문국의 경덕왕릉을 찾았다.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8번 국도를 따라 약 8.5㎞지점 금성면(金城面) 대리동(大里洞) 산 384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新羅 召文國 景德王陵
聞韶 古召文國 國廢在新羅伐休王時 今距一千八百年 事蹟荒眛 惟景德王墓 在竹里北三百步 相傳其地爲陵 洞士人吳克謙
始審得之 舊置一戶口 守官爲供祭
每水旱有禱 中世祗奉稍懈 居民胥以震竦 方謨醵金以修祀事
且治一石 表諸羨道 惟王百世 耿耿厥靈 昭在人心 流德報享 泊于無極 禁樵牧懲 惰慢則有 斯文是徵
소문국(召文國)......
한자로는 소(召,부를 소)문국인데 우리는 조문국이라 부른다.
그 연유가 궁금하다.
신라는 벌휴왕 2년(185년)에 소문국을 복속시켰다.
소문국은 나중에 문소군(聞韶郡)으로, 고려 때부터의성(義城)으로 불렸다고 한다.
召文(소문)은 옛 표기로 ‘조문/조물’이라고 하는 것에서
연유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의성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조문국이라고 하고, 일부 역사학자들은 소문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붉디 붉었던 땡볕 아래의 작약꽃은
잃어버린 나라......
사라져버린 역사처럼 시들어가기 시작한다. 또 다른 날의 찬란한 영화를 꿈꾸며 그렇게 시들어간다.
또 다시 영화를 찾을 수 있을까.....조문국
6월의 붉은 작약이길 바래본다.
경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대형 고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사라져버린 국가.....조문국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고분군들이다. 마지막 왕인 경덕왕릉으로 걸음을 옮긴다.
옛 조문국(召文國) 경덕왕릉(景德王陵)은
그 형식이 전통적인 고분(古墳)으로서 봉 아래 화강석 비석(碑石)과 상석(床石)이 있다.
능(陵)의 둘레가 74m이며
능의 전면(前面)에는 가로42㎝, 세로 22㎝, 높이 1.6m의 비석이 서있다.
그런데 이 왕릉이 발견되기에는 신기한 전설이 있으니 조선 숙종(朝鮮 肅宗)때
허미수 문집에 실려 있다.
먼 옛날에 한 농부가 외밭(瓜田)을 마련하기 위하여 작은 언덕을 갈던 도중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큼직한 구멍이 나타났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들어가 보니 돌로 쌓은 석실(石室)이 나타났다.
석실의 둘레에는 금칠을 하였고 가운데는
금소상(金塑像)이 있는데 그 머리에 쓴 금관(金冠)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농부는 욕심이 나서 금관을 벗기려 하였더니 그만 농부의 손이 금관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 날 밤에 의성군수(義城郡守)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나는 경덕왕(景德王)이다. 아무 곳 아무 데 와서 살펴보고 이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하여라”
고 현몽하였으므로
이튿날 곧 이곳을 발견하여 봉을 쌓고 관리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 지방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렇게도 전해 온다.
현재의 능지(陵地)는 약 500년 전에 오극겸(吳克謙)의 외밭(瓜田)이었는데,
외를 지키던 어느 날 밤 꿈에 금관(金冠)을 쓰고 조복(朝服)을 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서
“내가 신라시대(新羅時代) 조문국(召文國)의 경덕왕(景德王)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능(陵) 위이니 속히 철거를 하라” 고 이르고는
외직이의 등에다 한 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에 놀란 외밭 주인은 일어나 보니 꿈속에 노인이 써준 글이 그대로 자기 등에 씌어 있어 현령(縣令)께 고(告)하고
지방의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封墳)을 만들고
매년 춘계 향사를 올렸으며 지금도 제례(祭禮) 행사는 계속되고 있다.
그 외 200여 기의 고분이 부근에 산재하고 있다.
조문국박물관 고분전시관에 들어간다.
대리리 2호분이 속한 대리리고분군은 해발 100m 내외의 구릉지에 입지하며 60여기의 봉토분이 분포하고 있다.
2009년 5월부터 2010년 9월 30일까지발굴한 대리리 2호분의 내부 모습을 재현한 고분전시관은
당시의 유물 및
매장 풍습을 이해할 수 있게 전시하고 있다.
'사화랑' 사무라이의 어원?
의성군 춘산면 빙계계곡 빙혈에는 박찬 변호사가 검은 돌에 새긴 '조문국과 일본'이란 제목의 글이 있다.
그가 1926년 적도교웅(荻屠敎雄)이라는 일본인이 저술한 '미광'이란 책에서 나온 내용중 믿을 만한 것을 정히해 새겼다고 한다.
조문은 소문에서 나온 이름으로 여성의 음부인 '소문'과 같은 음이므로 여권중심의 나라였다.
귀도(鬼道)와 주술을 잘 하는 불미구가 왕이 돼
천년동안 30대가 이어졌으며,
이때 조문국 왕자가 변한과 왜국(일본)으로 넘어가 왕이 되기도 했다.
봉양면 구산1리는
'사화랑' 혹은 '사불랭'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힘이 센 사람들이 많아 외부에서 침입하지 못하는 마을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본의 '사무라이'라는 말이 여기서 전해졌다는 설도 있다.
(글출처; 위키백과사전, 영남일보, 의성군청, 문화재청,조문국박물관 홈페이지)
6월의 태양아래
붉게 피다 간 져버린 작약꽃처럼
역사의 뒤안길에서 소리없이 사라져버린 조문국......그 발자욱을 찾아 나서는 길도 의미있는 시간이다.
경북 의성으로의 여행
문화향기를 따라 나서는 일도 큰 즐거움이 된다.
인근의 의성마늘소도 맛본다면 오감이 만족할 수 있는 의성여행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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