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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으로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을 모신 모명재•─삶이 머문 여행/대구광역시 2013. 2. 22. 09:20
모명재(募明齋)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525길 14-21 (만촌2동 716번지)
모명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각각 이여송과 진린을 따라 조선에 파병됐던 명나라 작전참모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사당이다.
중국 두릉(杜陵) 출신으로 시성 두보(杜甫)의 후손이기도 한
두사충(杜師忠)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 이여송의 부관(지리참모)으로 참전해 활약했다.
그는 조선군과 긴밀한 전략협의를 했고, 그 과정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매우 가까워졌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정유재란(1597)이 일어나자 진린(陳璘) 도독의 비장으로 다시 참전했다.
두사충은 1598년 정유재란이 끝나자 매부이기도 한 진린을 압록강까지 마중한 뒤 자신은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귀화했다.
장차 명나라가 망할 것을 감지한 그는 귀화 후 대구에 정착했다.
처음에 경상감영공원 일대의 땅을 하사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이 그 곳에 들어서면서 계산동 쪽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계산동 일대는 두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는데...두씨들은 계산동으로 옮기자마자 주위에
많은 뽕나무를 심었고
그 때문에 이 일대를 뽕나무 골목이라 부르게 됐다.
그러나 사람이
늙으면 누구나 고향이 그리운 법!
수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는 두사충이었지만 고국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두사충은 최정산(最頂山=현재의 대덕산)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일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자쪽을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모명재의 ‘모명’은 두사충의 호로,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의미다.만동문(萬東門)
백천유수필지동(白川流水必之東)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두사충이 명나라를 잊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관련글인용;네이버백과사전, 대구광역시 수성구청,두릉공씨학생공파홈페이지)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사 이인수(李仁秀)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慕明齋)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1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2과 장혀3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이순신장군이 두번이나 우리나라를 위해 참전을 한 두사충에게 한시를 지어 마음을 전했다고 한다.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
모명재 주련에는 이 순신장군의 한시가 걸려 있다.
(좌←우방향)
北去同甘苦 同來共死生
城南他夜月 今日一盃情
북으로 가서는 고락을 함께 하고 / 동으로 와서는 생사를 함께했네
성곽 남쪽 타향의 달빛 아래 / 오늘 한 잔 술로 정을 나누세
모명재의 ‘모명’은
두사충의 호로,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의미다.
1966년 모명재를
건립했다는 중건기가 걸려있다.
증통훈대부규장각직각두공지묘(贈通訓大夫奎章閣直閣杜公之墓)
두사충의 묘인지 알고 올랐으나
그의 9대손 두한필묘였다.
형제봉으로 더 올라가야 한다니...다음에 둘레길이 생기면 다시 올라보리라.....ㅎ
△ 증통훈대부규장각직각두공지묘(贈通訓大夫奎章閣直閣杜公之墓)
재실 뒷쪽에 있는 무덤은 두사충의 8대손 차남인 두한필의 묘이다.
두한필의 호는 소남(小楠)으로 1823년(순조23년)에 태어난 1893년(고종30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어릴 때부터 부모에 대한 효행이 지극하였다.
나중에 조정에까지 소문이 퍼져
그의 사후에 정려(旌閭)가 내려오고 종3품 관직인 통훈대부 규장각직각(通訓大夫 奎章閣直閣)을 증직하였다.
나이가 더 많아지자 자기가 젊었을 때 대구 근교를 샅샅이 뒤져 잡아 둔 묘터를 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가마를 타고 묘터가 있는 고산(孤山)으로 향했다.
그러나 워낙 쇠약한 몸이라 도저히 고산까지 가지 못하고 담티재에서 되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사충은
아들에게 오른쪽의 형제봉을 가리키면서 저 산아래 계좌정향으로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 예언했다.
따라서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이 잡아둔 명당까지 가지 못하고
묘소를 형제봉 기슭에 쓰게 되었고
두사충이 잡아둔 묘터에는 나중에 고산서원이 들어섰다.
조만간 명품길 "모명재길"이 탄생 할 예정이다.
중국인들의 발걸음을 유도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며 이야기가 있는 둘레길,스토리텔링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대구 수성구청은 12억원의 예산을 들여 모명재~영남제일관 일대 10.5㎞ 구간을
트레킹 코스로
조성하여 7월 말쯤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모명재스토리텔링길이 완성 되면 대구에는 두 명의 조선귀화인 이야기길이 조성된다.일본인이 자주 찾는 녹동서원(대구 달성군 가창면소재)과 함께....
녹동서원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선봉에 섰던 일본인 모하당 김충선(일본명:사야가)을 모신 서원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임진왜란,정유재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병자호란 등에 큰 공을 세웠던 분이다.
이야기가 있는 대구 둘레길들......벌써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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