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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을 설계한 서재필박사의 기념관•─삶이 머문 여행/전라도(全羅道) 2009. 7. 27. 22:21
주암호를 몇 번이나 지나면서 만나게 된 서재필 박사의 기념관을 스쳐지나 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떤 마음인지 들러고 싶었다.
작년 7월에 개관한 기념관은 내게 행복과 희망을 심어 주었다.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 위치한
기념관은
문덕면 가천리에서 출생하신 선생을 위해 건립하였다고 한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서울의 서소문에 있는 독립문을 재현한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모습 그대로~~~
개화문은 사우로 들어가기전에 만나는 외삼문정도 된다.
자강문과 선양관이다.
송재(松齋) 서재필선생의 동상이다.
서재필기념관으로 들어간다.
많이 놀랐다.
이 정도로 대단하신 분인지는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그의 일생을 잘 정리해 두었다.
갑신정변의 3일 천하 그리고 미국으로 망명....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독립문을 세우신 분 그리고 독립신문 창간
이 정도가 내가 아는 서재필박사의 이력이었다. 근데 많은 정보를 알고는 놀랐다.
서재필선생의 아버지는 광언(光彦)이다.
어렸을 때 친척인 광하에게 입양되었고 7세 때에 상경하여 양모의 동생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한학을 배웠다.
1882년(고종 19)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교서관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무렵 김옥균·서광범 등과 사귀었다.
1883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 의숙에서 6개월간 일본어 교육을 받은 후 도야마 육군학교[戶山陸軍學校]에 입학했다.
약 7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7월 귀국해 고종의 승락을 얻어 사관을 양성하는 조련국 사관장(士官長)이 되었으나,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1884년 군대의 통솔권을 장악하고 군대의 훈련을 위해 청나라 장교를 부르자 군에서 쫓겨났다.
1884년 갑신정변에 적극 참여하여 정변계획중에는 일본유학의 경험을 토대로 김옥균과
조선주둔 일본군 무라가미[村上] 중대장 간의 연락을 담당했으며,
정변진행중에 사관생도를 지휘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정권장악 후
구성된 정부에서 병조참판 겸 후영영관에 임명되었다.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일본이 갑신정변에 깊이 참여했다는 외국의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이들을 냉대하자 1885년 4월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를 공부했다.1886년 9월에는 펜실베이니아 주 윌크스베어 시에 있는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해 1889년 6월 졸업했다.1889년 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의 전신으로 당시 워싱턴의 고등학교 졸업자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한야간대학인 코크란대학에 입학하여 1893년 졸업하고,그해 의사면허를 취득했다.이때는 미국 육군의학박물관에서 동양서적을 번역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시민권을 얻었다.1894년 6월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한 후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했으나백인들의 유색인에 대한 편견으로 생활이 어려워조선으로 돌아올 때는 주미조선공사관에서 여비를 마련해주었다.
1895년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민중운동을 이끌어 오시는등
평생을 조국의 광복과 근대화를 위해 열정을 다하시다
1951년 병석에서 우리나라 명운을 통탄하며 8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다. (자료;다음백과사전)
찾아가는길 경부고속도로-대전~통영간고속도로-진주JC-남해고속도로-순천IC
->보성방면(18번국도)->서재필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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