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적 21호인 경주 김유신묘•─삶이 머문 여행/경상북(慶尙北) 2009. 7. 19. 18:56
김유신묘 소재지; 경북 경주시 충효동 산7-10 (사적 제21호)
지난 겨울의 이야기와 사진을 꺼내든다. 컴퓨터의 파일 저 밑바닥에 숨어 있던
먼지 묻은 파일을 검색하니
삼국통일을 이루었던 김유신장군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온다.
얼마전에
충북 진천에 흥무대왕 생가터를 다녀왔는데
오늘의 이야기는 그가 묻혔다고 전해지는 김유신 장군의 묘(墓)이다.
인생은 왔다가 가는것이 정한 이치임을 부정할 수 가 없다.
김유신 장군이 죽은 뒤 흥덕왕이 그를 흥무대왕이라 받들었다.
김유신묘를 들어가면서 만나게 되는
흥무문이다.
호젓한 소나무길을 걷고 있노라면 자연히 옷매무시를 고치게 된다.
고즈늑함이 잔뜩 묻어난다.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대단히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무덤 주위의 둘레돌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에 보이는 무덤양식으로,
성덕왕릉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자료;문화재청)
김유신묘를 들어서면서 좌측에 보이는 비석이다.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라고 쓰여있다.
여기서 삼국유사를 잠시 살펴본다.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이런 내용이었다.그러나 현재 그 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경주부윤이 세운 비만 남아있다.결국 이 비는 경주부윤이 1710년에 세웠다는 야그....
다시 우측의 비를 하나 살펴본다. 개국공순충장열흥무대왕릉이라고 쓰여있다.
세운지 100년이 안되었다고 설명해 주신다.
아직도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김유신묘를 보면서 애써 외면한다.
경덕왕릉이라는 주장 그리고 김유신장군의 묘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참으로 많은 세월동안
반박하고 회자되면서 정리가 되지 않고 있다.
신기한 것은 비가 오거나 고의로 물을 부으면 릉(陵)자가 묘(墓)로 변한다.
검은색으로 변한다.
아마도 각기 다른 재료로 릉이란 글자를 지우려고 했던것 같다.
이번에도 누군가 물을 부어 본 모양이다.
누가 이렇게 만든것인지 알수 없지만
우리의 문화재를 훼손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
무덤의 둘레석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옆모습이 아주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것이 인상적이다.
오랜시간 설명을 잘 해 주신 경상북도 문화유산해설사인 전순희선생님이었다.
늦었지만 감사드립니다.
돌아서 나오는 길에 비각 하나가 만날 수 있었다.
신라태대각간이라고 쓰여있으며
김유신의 업적을 기리는 내용 같아 보였다.
찾아가는길 경부고속도로-경주IC->시외버스터미널->영천방면(4번국도)->서천교->위와 같은 도로를 만남->김유신장군묘
'•─삶이 머문 여행 > 경상북(慶尙北)'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항죽도시장의 풍경들 (0) 2009.08.16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괘릉 (0) 2009.07.29 화수루와 까치구멍집 (0) 2009.07.17 포항북부해수욕장도 개장했다. (0) 2009.07.02 구미 박정희생가를 다시 들렸다. (0) 2009.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