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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공원에서 만난 수수한 크리스마스불빛들..•─삶이 머문 여행/대구광역시 2011. 12. 22. 21:03
자주 지나게 되는 국채보상공원...
그 공원에는 화려하진 않지만 예쁜 조명들이 설치되어 있다.
오늘은 시간을 내어 국채보상공원을 산책한다. 동지인 오늘은 어제보다 더 추운 날씨이다..그래서 좋다.
행복한 마음을 이끌고...
오랫만에 국채보상공원으로의 야간 촬영에 나선다.
국채보상공원은
1907년 대구에서 비롯된 국채보상운동의 시민정신을 기념하고
제2의 국채보상운동 전개로 IMF 경제난 극복과 도심지내 녹지공간 확보 및 시민의 안락한 휴식공간 제공을 위하여
명칭 또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으로 정하여
1998년 3월부터 1999년 12월까지 중구 동인동에 조성된 공원이다.
공원내 달구벌 대종은
향토의 얼과 정서가 담긴 맑고 밝은 소리가 울려 만인의 기상을 일깨우고
화합과 번영을 염원하는 대구시민의 뜻을 온누리에 알리고자 1998년 12월 22일 동인동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내에 건조 설치하였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2가 42번지
1904년의 고문정치 이래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하였다.
1905년 일본은 식민지 기초 작업의 제일보로 한국의 문란한 화폐를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화폐정리채 3백만 원을 차입해 들여왔다.
이어 그 해 12월에는 화폐개혁에서
비롯된 금융공항을 구제한다면서 1백 5십만 원을 또 차입하여 들였다.
통감부 설치 이후 일제는 한국정부에 강요하여 교육제도의 개선,
금융기관의 확장정리, 도로 항만시설의 개수확충, 일인관리 고용 등 각종 명목으로
고이율의 차관을 들여오게 하여 국채가 격증되어 갔다.
이렇게 일본의 계속된 차관공세로 2년여 사이에 한국정부는 원금만 하여도 1천 6백 5십만 원에 달하는 채무를 지게 되었고
해마다 늘어나는 이자 또한 상당한 금액이었다.
1907년 2월에는 당시 신채로 약 3백 5십만 원의 구채를 정리하여 1천 3백만 원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국채는 당시의 국가 재정으로는 갚을 수 없는 고액이며
또한 그대로 둘 경우 해마다 고율의 이자가 가산되어 마침내 전국토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고
2천만 민족은 그들의 노예가 되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운의 절박함에 드디어 1907년에 이르러 거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료인용: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대구시청)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여기에 오신
모든분들...아름답고 행복한 삶이 되시고 하늘의 평화가 가정과 함께 하시길 희망합니다.
건강하시고 메리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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