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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조선궁궐 덕수궁(德壽宮)

노루귀사랑 2008. 3. 11. 00:19

 

덕수궁(德壽宮)

서울 중구  정동 5-1 (사적 제124호)

 

조선의 궁궐이며 광해군때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 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이 궁궐이 모두 불에 타서

 선조 26년(1593년)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은 대안문(大安門)이었다.

대한문은 1906년에 고쳤다. 현판은 한성판윤 남정철님의 글씨이다. 

 

 

 

법전인 중화전의 정문에 해당되는 문이다.

중화문은 현재 단독 건물 처럼 남아 있으나 원래는 다른 궁궐에서와 같이

좌우로 연결된 회랑이 동서쪽으로는 물론 거기서 다시 남에서 북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보물 제 819호이며,

왕이 백관의 하례를 받고 조례를 행하며 공식적인 행사를 집행하였던 곳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 단층의 다포계로 팔작지붕이다.

 

  

 

품계석이 있는데

맨 앞줄에 있는 정일품이 최고의 품계이다. 

 

 

 

 

 

 

 

 

 

공포위로 망이 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부시라고 한다.

 새들의 분비물에 의한 건물 부식을 막기 위하거나

새가 둥지를 틀면 구렁이가 달려들기 때문데 살생을 면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석조전은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집무실이다. 

서양 신고존주의 양식의 3층 돌집이다.

 

 

 

 

 즉조당과

준명당이 나란이 자리하고 있다.

 

 

 

 

석어당은 선조임금의 추모처이자

인목대비의 유폐처이다.

1904년에 불타 그 해 다시 지었다고 한다.

아마도 단청을 하지 않은것은 아픈 역사를 대변하는곳이라 그럴거라는 혼자만의 생각을 해본다. 

 

 

 

 

 

 

조선조 제15대 광해군과 제16대 인조가 즉위하셨다.

현재의 중화전이 지어지기 전에 이곳이 임시 정전으로 사용되면서 광무 원년(1897년)엔 태극전 이라 하였다가

이듬해에 중화전으로 고쳐 부르게 된다.

 

 

 

 

준명당은 고종이 실질적인 업무를 보거나

신하들과 회의를 하던 편전(便殿)이었다.

이곳의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광무 원년(1897년)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함녕전은 보물 제 820호이며

고종의 생활하는 침전이자 돌아가신 승하처이다. ㄱ자 형태이며 1904년 불타 그해 다시 지었다.

 

 

 굴뚝의 모양이 아름답다.

아마도 구중궁궐에서 적막한 삶을 사는

아낙들을 위한 배려로 아름다운 문양을 새긴듯 하다.

 

 

 

 

 

 

 

 

정광현은

함년전 뒤뜰에 위치한다.

1900년대에 지은 건물로 조선과 서양의 건물이 절충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덕홍전은 귀빈들의

접견처로

 덕수궁에서 가장 나중에 지었다고 한다.

카펫과 전등도 있고 특히 황금 이화문(오얏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오얏꽃은 전주이씨를 상징한다.

 

 

돌아오는길에

가까운 곳에 있는 숭례문을 들리지 않으려 했다.

아니 오히려 먼길로 돌아서고 싶었다. 가슴이 아플듯 했는데 결국은 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