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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리했던 상해임시정부청사(臨時政府舊址)

노루귀사랑 2014. 7. 19. 05:00

 

 

중국속에서 만나는 또 다른 한국....임시정부청사를 찾았다.

7년동안 항일운둥을 벌였던 상해임시정부.....하지만 이제는 철거의 위기에 놓여있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의 철거요구로

다음 장소는 홍구공원이 될 것 같다는 가이드의 설명....ㅎ

지난 번 중국 창(長沙,장사)시를

여행 한 적이 있다. 그 때 만난 임시정부청사가 있었다.

항일투쟁시 백범 김구선생님께서 휴양하신 곳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장사의 청사를 다녀 온 후로

임시정부 청사는 이번이 두 번째다.

이곳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26년 7월부터 1932년 4월까지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한 역사 깊은 장소이다.

    이 청사는 상해시 정부와 대한민국 독립기념관 등 한-중 양국의 협조로 이곳을 떠난지 60년만인 1993년 4월 13일 1차 복원하였고

2001년 12월 건축물을 전면 보수하고

전시 시설을 확장하여 역사에 길이 넘을 유적지로 단장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청사

☏ 0086-21-53829554 / 0086-21-53829057

 

 

보경리 4호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는

1925년에 건축된 중국 근대식 석고문 양식의 건축물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3일 상해에서 수립되었으면, 수차례 이전을 걸쳐 1926년 이 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의거로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부득이 상해를 떠나게 되었는데.....그 7년간의 임시정부가 있었던 곳이다.

(글, 일부사진출처:대한민국임시정부유적지관리처,  http://dh.luwan.sh.cn/indexkr.html)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서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장소이다.

임시정부 청사의 복원사업은 1990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상해황포구정부 및 관계부문과 한국독립기념과. 삼성물산 등

국내외의 커다란 관심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상해임시정부의 입장가격은 20위안이다.

개인 관람객은 신분증이나 여권을 제시하여야 하며 관람시간은 9시부터 17시까지이다.

월요일 오전(9:00-12:30)에는 개관하지 않는다.

 

 

매우 낡고 도로 옆에 위치해 있어서

언뜻 보면 쉽게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만큼 초라하지만, 하루에도 수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이다.

1층에서 6분가량의

비디오 시청을 하고 나면 2층과 3층의 전시관을 관람하게 된다.

 

 

 

 

△ 임시정부의 이동경로이다.

일제의 반격과 중일전쟁(1937)으로 상하이(1919)·항저우[杭州(항주), 1932]·

전장[鎭江(진강), 1935]

창사[長沙(장사), 1937]·광둥[廣東(광동), 1938]

류저우[柳州(유주), 1938]·치장[1939]·충칭[重慶(중경), 1940] 등으로 몇 차례에 걸쳐 거처를 옮겼다.

상하이시기(1919∼32)에는

국내외 동포사회에 통할 조직을 확대하면서 외교활동이나 독립전쟁 등을 지도·통할하는 데에 주력했고,

충칭시기(1940∼45)에는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하여 미얀마전선에 참전하였다.

(글인용;네이버,다음백과사전에서)

 

 

 

3.1운동의 영향으로 1919년 4월 13일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여러 차례의 이전을 거쳐 1926년 7월 이곳 마당로 306롱 4호에 정착하였다.

1930년 1월 한국독립당이 이곳 상하이에서 창립되었으며, 1931년에는 한인애국단도 조직되었다.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령은 김구 선생이었다.

 

김구(1876.8.29-1949.6.26)

호 백범이며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에서 1945년까지 27년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과 주석 등

직위를 담임하였으며

한국 독립운동 역사상 수많은 중대한 사건을 조직 지도 하였다.

  김구 선생은 상해 중경들 중국 각지에서 한국 독립운동을 징행하면서 중국 인민들과 깊은 우정을 맺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제의 “상하이 사변 전승 및 일본 국왕 생일 축하 기념식” 식장에서 폭탄 투척 의거를 단행하여

일본 침략군 총사령관 시라카와를 비롯한 7명을 폭사, 부상케 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일제의 발악적인 수색과 탄압을 피하여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났다.

이곳 마당로 306롱 4호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가장 오랫동안 사용했던 청사로서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건물이다.

 

 

 

 

 

 

1990년 2월 19일 상하이시 황포구인민정부에서는

 ‘구급 문화재’로 지정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관리처’에서 관리하고 있다.

상하이 임정청사는 1993년 최초로 복원하여 정식 개관하였으며,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유적지관리처’와 ‘대한민국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노후된 청사 건축물을 보수하고

전시실을 확장하여 2001년 재개관하였다.

 

 

1993년 복원 이후 20여년 동안

300만명 이상의 한국 관광객들이 이곳을 방문하였다.

오늘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는 한민족의 맥을 이어준 “독립운동성지”로서 한국 국민들의 마음속에 살아 숨쉬고 있으며,

한. 중양국의 우의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전시관 내에는 당시 쓰였던 가구, 서적,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자료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 또한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물 내에 작은 상점을 운영하여 청사 유지비를 마련하고 있는데, 우표, 악세사리, 장식품 등 기념품들을 팔고 있다.

전시실에서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나중에 알았음....ㅎㅎ)

 

 

 

 

 

 

 

 

 

△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들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남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명은 우의(禹儀) 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1926년 서당에서 수학하던 중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당시 윤봉길은 19세였다. 

우선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의 문맹퇴치와 민족의식의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밖에도 1927년「농민독본(農民讀本)」3권을 저술하여 본격적인 농촌개혁의 실행에 착수하였다.

 

 

  윤봉길은 1930년 3월 6일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1931년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조국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 국무령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된다.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경 홍구공원에서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

윤봉길은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뽑아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위로 투척하였다.  

이 의거로 백천과 하단은 사망하고 야촌 중장은 실명, 육군중장 식전은 다리를 절단하였으며 

중광은 절름발이가 되고 

촌정과 우야(友野)도 중상을 입었다.

 

 

  한동안 침체일로에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윤봉길의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피체된 윤봉길은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8일 일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32년 12월 19일 순국하였다.  

  윤봉길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 처리장에 방치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6년에 조국에 환국 안장되었다.

 

 

7년간의 상해임시정부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 윤봉길의사 의거(擧)이후 청사를 옮기게 될 때까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을 다 했던 임시정부청사였다.

하지만 그 자리역시 이제는 내어줘야 할 형편......

홍구공원으로의 이동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건물자체를 훼손시키지 않고 그대로 옮겨간다고 한다.

중국에 산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에 대한

지속적이고 전폭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혹시 중국까지 가기 어렵다면

함평에 있는 상해임시정부청사를 둘러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중국에 있는 상해청사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으며 각종 소품과 책상, 집무실 등을

중국 현지에서 그대로 제작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