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유적지와 여유당(정약용생가)
양평으로의 여행중이다.
두물머리, 수종사등으로 행복했던 기억.....그 기억의 언저리를 따라가다보면 다산유적지와 여유당을 만나게 된다.
이번에는 산도 절도 문화재도 아닌 다산 정 약용을 만나기 위한 걸음이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실학을 집대성한 조선조 후기의 학자이다.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답게 정치 · 경제 · 역리 · 지리 · 문학 · 철학 · 의학 · 교육학 · 군사학 · 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 걸쳐 방대한 양의 저술을 넘겼다.
다산유적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1(능내리 85-2)
마재마을
주차장(주차무료)에 차를 세우고 다산유적지를 향한다.
유적지까지는 불과 100m쯤.....
가는 길에 각종 조형물과 마주하게 된다. 다산 문화의 거리라고 이름지어진 길은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다.
가장 먼저 보이는 조형물은 '꺼지지 않는 불'이란 제목이 붙었다.
500여권의 서책이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형상화되었다.
다산유적지 입구에는
97년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수원성)을 쌓을 때
역학적인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데 사용되어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던
거중기모형이 설치되어 있다.
외삼문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다산 유적지의 입구.....출입문이다. 현판에는 실학연수(實學淵藪)라고 적혀있다.
실학을 연수한다....뭐 이런 뜻일까......
세 개의 홍살문 아래에 배다리가 놓여있다.
이 배다리는 정조 13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길 때
정 약용선생의 고증에 의해 뚝섬에 배다리를 놓았다. 그 모습을 여기에 재현한 모습이라고 한다.
여유당(與猶堂)앞에 선다.
‘여(與)’와 ‘유(猶)’는
노자의 도덕경 15장에 나온 글로 겁이 많은 코끼리와 의심이 많은 원숭이를 뜻한다.
‘與兮若涉川 猶兮若畏四隣(여혜약섭천 유혜약외사린)’
즉 매사에 신중하게 심사숙고해서 행동하고 말을 하라는 의미로 ‘여유(與猶)’란 말을 사용했다.
여유당(與猶堂)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다.
깔끔하고 반듯한...
마치 다산 정약용의 성품을 닮아있는 것 같다. 검소하며 베풀기를 좋아했던 다산의 인품
그 인품을 조금이라도 배웠음 좋겠다.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 있다.
그 옛날에는 이곳을 소내(苕川) 또는 두릉(杜陵)이라고 했고 다산의 5대조부터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 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기념물 제 7호다.
다산 정약용선생과 부인 풍산 홍씨가 합장되어 있는데, 표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마련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 1쌍이 있다.
후에 묘 뒤로 담을 둘렀으며, 묘비도 1기 추가하였다.
흔히 다산을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한다.
이익에서 유형원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 하며 탈주자학적 경학체계를 세워
19세기 초 실학파의 철학적 입장을 확립한 다산은 성호학파와 북학파의 주장을 한데 묶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용광로 안에 녹였다가
“다산학”이라는
자신만의 독창적 학문을 완성한다.
한쪽은 이익과 유형원의 학풍(經世 致用)을 이어받고
다른 한쪽은 박제가 · 유득공 등 북학파의 인물들과 교유하면서 북 학(이용후생(利用厚生)을
섭취한 다산은 이들의 학문적 성과 위에서
“다산학”이라는 거대한 실학의 봉우리를 만들어 낸다.
내삼문안에는 문도사가 자리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선생의 사당이다.
다산선생의 묘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다산 기념관에 들린다.
다산기념관에는 다산의 친필 서한 간찰(簡札) ·
산수도 등과 대표적 경세서인 「목민 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사본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실물 크기의
4분의 1 과 2분의 1크기의 거중기와 녹로가 눈길을 끈다.
다산은 1762년(영조 38년) 음력 6월 16일,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아버지 나주정씨(羅州丁氏) 재원(載遠)과 해남윤씨(海南尹氏)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다산의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용보(頌甫)이고
호는 사암(俟菴),
열수(冽水), 자하도인(紫霞道人), 문암일인(門巖逸人) 등이며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10세부터 과예(課藝)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고
아버지가 잠시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 경전(經典)과 사서(史書)·고문(古文)을 부지런히 읽었으며
시율(詩律)을 잘 짓는다고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다산은 스스로도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제법 문자를 알았다"고 회고하였으며
그가 7세 때 지은
「산」이라는 시가 이를 입증하여 준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다산은 23세 때(1783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여러 차례의 시험을 통해 뛰어난 재능과 학문으로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았다.
28세때(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으며, 첫 벼슬인 희릉직장을 비롯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쳤다.
이즈음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는데 유형거와 거중기를 만들어 사용할 것을 건의하여 많은 경비를 절약하였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하였으며,
연천 현감 김양직과 상양 군수 강명길의 폭정을 고발하여 처벌하였다. 이를 통해 관리의 책임과 의무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은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노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1801년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다산은 포항 장기로 유배되고, 셋째형 약종은 옥사하고,
둘째형 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산은 서울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은 다산에게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이 시기에 다산학의 두축을 이루는
경세학과 경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500여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다.
57세 되던 해에 유배 생활을 마친
다산은 그 후 다시는 벼슬길로 나서지 않았고 평생에 걸쳐 쓴 글들을 정리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미쳐 완성을 보지 못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고
『흠흠신서』, 『아언각비』, 『경세유표』 등의 저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1836년 75세의 일기를 끝으로 죽음을 맞이한 다산은 실학을 집대성한 탁월한 학자였으며,
게다가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한 인물이었다.
지필묵을 꺼낸 다산은
몇 해 전 부인이 인편에 보내온 시집올 때 입었던 색바랜 다홍치마를 꺼 내
그 위에 애절한 마음을 그리고
안타까운 심정을 시로 적어 외동딸에게 선물한다.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 敞裙六幅 歲久紅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폭을 내왔다.
이제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기에 가위로 잘라 네첩을 만들어 두아 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준다.)
(글인용; 다산 정약용홈페이지 http://www.nyj.go.kr, 남양주시청, 문화재청, 다산문화제)
다산의 동상뒤로는
선생이 집필하신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한 시대의 선구자며 성인, 대학자, 목민관인 그의 업적과 사상을 둘러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돌아서는 걸음 뒤로
그의 쩌렁한 음성이 내 목덜미를 후려잡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