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머문 여행/부산,경상남도

국립 김해박물관에서 가야(加耶)를 느낀다.

노루귀사랑 2012. 12. 27. 09:27

 

가야문화를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국립 김해박물관

소재지;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90 (구산동 232번지)

예전 김해여행에서 빠졌던 국립 김해박물관을 찾았다.

국립김해박물관은 고대국가의 하나인 가야(加耶)의 문화유산을 집대성하기 위해 1998년 7월 29일 개관하였다.

가야의 건국설화가 깃든 김해시 구지봉(龜旨峰) 기슭에 자리 잡은

국립김해박물관은

가야의 문화재를 집약 전시하고 있으며,

아울러 부산·경남 지역의 선사시대의 문화상과 가야의 성장 기반이 된 변한의 문화유산을 전시하고 있다.

가야는 다른 고대 국가들에 비해 역사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유물·유적의 발굴을 통해 가야사를 복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국립김해박물관은

다른 국립박물관들과 달리 고고학 중심 전문 박물관으로 특성화 되어 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덤인

고인돌 가운데

남부 지방에서 널리 관찰되는 모양은 땅위에 덮개돌과 덮개돌 받침이 드러나고

땅속에 주검과 유물이 들어가는 돌널이 있는 구조이다.

김해 시내에는 서상동과 내동에 고인돌이 있었으나 도시의 확장과 개발로 인해 내동 고인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며,

부산대학교 박물관과 동의대학교 박물관에서 각각 조사한 3기의 고인돌만 알려져 있다.

김해박물관에 옮겨놓은 고인돌은 내동 고인돌 가운데 하나이다.

 

 

철광석과 숯을 이미지화 한 검은색 벽돌을 사용하여

철의 왕국 가야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김해박물관은 건축가 장세양씨의 유작으로 알려져 있다.

 

 

평일에는 오전 9시 ~ 오후 6시 , 주말과 공휴일은 오전 9시 ~ 오후 7시에 관람할 수 있다.

야간개장은 매주 토요일(4월 ~ 10월, 오전 9시 ~ 오후 9시)이며

연중 휴관일은 1월 1일과 매주 월요일입니다.

단, 월요일이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제2조에 따른 공휴일일 때에는 공휴일 다음의 첫 번째 평일이다.

 

 

1층 전시실로 들어선다.

 

"가야로 가는 길"

 

 

△ 좀돌날몸돌(구석기시대,진주집현)

 

 

 

 

△ 갈판.갈돌(신석기시대.창녕비봉리)

도토리같은 딱딱한 견과류를 가루로 만들거나 곡물의 껍질을 벗기는데 사용한 것이다.

넓은 갈판 위에 도토리등을 놓고

양손으로 갈돌을 밀고 당겨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 겹입술토기(신석기시대.부산 금곡동)

 

 

△ 톱니입술무늬토기(신석기시대.통영 연대도)

 

 

 

 

 

 

△ 그물추(신석기시대.창녕 비봉리)

 

 

△ 반달돌칼(청동기시대.경남지역)

 

 

인간이 두발로 서서 걷기 시작하면서 손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게 되었다.

도구 제작은 인류가 자연을 극복하면서 풍요로운 삶을 꾸려나가게 되는 첫 발걸음이었다.

인간은 필수 영양소인 단백질과 염분을 섭취하기 위해 동물 사냥에 나서게 되었다.

돌을 깨뜨려 끝을 날카롭게 만들거나 한쪽 면에 날을 세운 석기로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고기와 뼈를 분리하여 먹을 수 있도록 하였다.

주된 사냥감은 사슴ㆍ노루ㆍ멧돼지 등이었다.

몸집이 작고 빠른 동물들을 사냥하기 위해 활과 화살이 등장하는 등 도구는 점점 발전하였다.

 

 

△ 가지무늬토기(청동기시대.진주대평)

동체부에 가지모양의 검은 장식이 있는 토기이다. 모양과 제작방법이 붉은간토기와 흡사하다.

 

 

△ 사발(초기철기시대,합천 영창리)

 

 

 

 

△ 다호리 1호 널무덤(기원전 1세기, 창원)

돌덧널무덤은 5세기 무렵부터 널리 쓰인 무덤으로,

두텁게 깬 돌을 쌓아

긴 네모꼴의 돌덧널을 만들어 그 속에 주검과 껴묻거리를 묻었다.

야외전시장에 전시된 돌덧널 무덤은 경남 창원시 다호리유적에서 발굴된 것이다.

 

 

△ 철기(창원 다호리)

 

 

 

 

 

 

 

大鳥羽送死 其意欲使死者飛揚
죽은 이여! 큰새 깃털처럼 훨훨 날아다니게...
 『삼국지』위서 동이전 변진조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은 새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안내한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해석된다.

고구려ㆍ신라ㆍ가야의 건국, 영웅의 탄생ㆍ행적과 관련된 설화에서도 새(알)의 상징적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새로운 탄생의 기원과

죽은 이의 영혼을 이끄는 매개자로서 새를 신성시하였음을 보여준다.
 낙동강을 생활기반으로 하는 변한사람들에게 해마다 찾아오는 철새는 친숙하면서도

인간보다 신에게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존재였다.

 

 

 

 

 

 

 

 

 

 

 

△ 재갈(가야.김해대성동)

 

 

 

 

△ 목항아리.그릇받침(가야.김해 대성동)

 

 

△ 금동관(가야.고령 지산동)

고령 지산동 32호묘에서 출토된 것이다.

불상 광배모양의 솟은 장식 양쪽으로 작은 연봉오리모양의 장식이 하나씩 있다.

 

 

△ 낫모양철기(가야.고령 지산동)와 끌모양의 철기(가야.고령 지산동)

 

 

△ 말띠꾸미개와 말띠 드리개(가야.고령 지산동)

 

 

아라가야는 변한 12개 소국 가운데 안야국(安邪國)이라는 함안지역의 정치세력에서 출발하였다.

아나가야(阿那加耶), 아시라국(阿尸良國), 안라국(安羅國)등

 여러 명칭으로 불려졌으며,

왕궁지와 통치자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말이산ㆍ도항리 고분군이 남아 있다.

아라가야 토기는 화염형투창을 가진 굽다리접시가 특징이며, 말갑옷, 고리자루큰칼, 미늘쇠 등이 출토되었다.

아라가야의 전성기는 주로 5세기대 약 100년간이며, 5세기 후반은 아라가야의 최전성기이다.

남강연안의 의령, 진주지역까지 영향을 미쳤다.

신라의 계속되는 압력에 대항하여 안으로 가야세력의 결속을 도모하고,

밖으로 백제ㆍ왜와 손을 잡기도 하지만, 결국 6세기 중반 신라의 힘에 굴복하고 말았다.

 

 

 

 

 

 

소가야는 고성과 사천지역에 있었던 가야세력이다.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3세기까지 변한의 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 혹은 고자국(古自國)으로 불렸던 세력이 성장한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4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소가야의 여덟 나라(八國)는 금관가야가 장악하던

남해안의 해상교역권을 빼앗기 위해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이 사건[浦上八國의 戰爭]을 계기로 소가야는 비록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지만, 상당기간 존속하다가 신라에 흡수되었다.

송학동고분군, 내산리고분군, 율대리고분군이 대표적이다.

 

 

 

 

 

 

 

 

 

 

 

 

 

 

가야의 집모양은 발굴된 집자리와 집모양토기를 통해 알 수 있다.

구덩이를 파서 만든 움집과 기둥을 세워 만든 다락집이 있는데, 움집은 살림집, 다락집은 창고로 추정된다.

움집은 구덩이를 파고

기둥을 세운 다음 가장자리를 따라 벽을 세운 형태이다.

집 안에는 부뚜막과 온돌시설이 있는 것도 있다.

 다락집은 높은 기둥을 세워 만드는데, 이는 짐승의 침입과 습기로부터 곡식을 보호하기 위한 창고와 같은 것이다.

곡식은 주로 큰 항아리에 넣어 보관하였다.
 전시된 토기들은

삼한과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큰 항아리이다.

 저장용으로 사용된 것도 있지만, 큰 토목공사를 할 때 제사용으로 쓴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고대의 장신구는 단순히 신체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 이외에 다양한 문화적ㆍ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다.

화려한 장신구는 미적인 목적과 함께,

사용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역할도 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진변한 사람들은 금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꿰어 보배로 삼는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변한이 성장ㆍ발전한 가야지역에서는

구슬을 이용한 장신구가 많이 출토된다.

금이나 은으로 만든 장신구는 5세기 중엽 이후에 많아진다.

 

 

△ 송풍관(삼국시대.밀양 사촌) 

 

 

 

 

 △ 헬멧을 쓴 말

전쟁이 잦았던 삼국시대에는 말에게도 갑옷을 입히고 투구를 씌웠다.

말이 쓴 투구를

말머리가리개라고 한다.

 

 

 

 

 

 

 

 

 

상형토기들이다.

일반적인 그릇이 아닌 특별한 형태의 그릇이나 형상화한 토제품 등을 포괄하는 것을 말한다.

가야지역에서는 오리ㆍ사슴ㆍ말과 같이 동물을 본떠 만든 것을 비롯하여, 집ㆍ배ㆍ수레ㆍ뿔 등 사물을 형상화한 다양한 상형토기가 출토되었다.
이러한 토기들은 주거지보다는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일상생활에 쓰이기보다는

무덤에 부장하거나 제의(祭儀)에 사용할 목적으로 특별히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5~6세기대 가야연맹의 중심은 대가야였다.

대가야는 뚜껑목단, 뚜껑합등을 비롯한 독특한 토기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토기는 일본의 큐슈[九州]에서 긴키[近畿]까지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주문경,모자모양투구,충각부주,삼각판갑옷,횡장판갑옷,로만글라스(Roman-glass)등이 대가야지역을 중심으로 발견되었다.
특히 이러한 유물들은

대외교류관계를 증명하는 것으로 지배층의 위신재로 추정된다.

(글인용: 국립김해박물관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