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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칠천도..조선수군이 대패했던 칠천량해전을 만나다.

노루귀사랑 2012. 1. 31. 09:00

 

작년 10월 경남 거제시 장목면 농소리에 자리하고 있는 거제 "농소몽돌해수욕장"을 찾았었다.

예전 포스팅이다.

http://blog.daum.net/euijj31/11296213

농소몽돌해수욕장인근에 있는 칠천도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그냥 스쳐왔던 칠천도..그리고 거제도를 3개월만에 다시 만난다.

정유재란당시...우리 조선수군 대패했던

"칠천량해전"이다.

 삼도수군통제사가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교체되고

 원균이 이끄는 함대가 일본함대를 치러갔다가 일본군의 야습으로 궤멸당한 해전이다.

인근에 칠천량 해전공원을 조성하고 있었다.

 

 

칠천도(七川島)는 경상남도 거제시의 섬이다.

동경 128°39', 북위 34°59'에 위치하며, 면적은 9.219㎢, 해안선의 길이 25㎞이다.

2000년 1월 1일에는 거제도와 칠천도 연륙교로 연결되었다.

 

 


1597년 음력 7월 4일...100척이 훨씬 넘는 판옥선, 거북선과 1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수군을 총동원한

원균은 부산인근에서 바람과 파도를 고려하지 않고 적을 추격하다가

12 척의 판옥선을 표류하게 해 잃어버리고 9일에는 오히려 적의 반격을 받아 역시 많은 전선을 잃게 된다.

실록에서는 이 때 아군이 활 한 번 제대로 쏘지 못 한 채 패했다고하면서

아군의 대응을 문제삼았고,

케이넨의 조선일일기에는 이 때 반격한 병력이 일본 수군이 아닌 육군 수송병력인 것이 확인된다.

 

 

 

조선 수군은 가덕도에서 물을 확보하기 위해 내리는데 이 때 적의 기습을 받았고, 원균은 400명의 아군을 버리고 도주한다.

97년 2월 이순신이 부산포로 출동했을 때

가덕도에서 5명이 전사하자

가덕왜성을 직접 공격해서 요시라가 직접 와서 화친을 구걸했던 것과는 비교된다.

 

거제도 서쪽의 작은섬 칠천도에 상륙한 조선수군은 일본군에 야습을 당해 칠천량에서 일본수군에게 포위당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함대 대부분이 격침되고 수군도 대부분이 전사했다.

원균은 제대로 된 지휘를 하지 않은 채 견내량에서 삼도수군을 상륙하게 한 뒤 반격하지도 않은 채 도주했다.

포로가 되었던 김완이 진술한 해소실기에는

이 때 아군이 각기 수사를 따라 퇴각했다고 하면서 조선 수군이 기습을 받은 상황에서도 지휘권이 유지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지휘를 무시한 채 퇴각한 배들은 거제, 진해, 한산도 방면으로 퇴각했고,

 한산도로 퇴각한 배설 휘하의

경상우수영 병력과

임치첨사 홍견, 가리포첨사 이응표, 해남현감 류형, 녹도만호 송여종 등은 명량해전 전후로 수군으로 복귀한다.

이를 통해 춘원포로 퇴각한 것은 원균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성 지역 추원포까지 후퇴하여 주둔했다가 통제사 원균과 우치적은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왜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전선 12척과 군사 120명을 수습하여 후퇴했고

경상우수영의 부하

우치적도 원균을 뒤로한 채 전장에서 탈출한다.

 

원균은 도망치다가 소나무 아래에 숨어있던 일본군...

특히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휘하 군사들의 습격을 받아 아들 원사웅과 함께 전사했다.

이때 김완은 일본군의 포로가되었다.

김식의 보고에는 원균이 적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고 돼 있지만 권율의 군관 최영길의 보고로 원균이 전사하지 않은 게 확인되었고,

조정에서는 1601년에 이르러서야 원균의 사망을 언급한다.

충청수사 최호와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상륙하지 않은 채 싸운 후 전사했으며

경상우수사배설은

휘하의 판옥선을 이끌고 도주해 한산도를 정리한 후 퇴각하였다.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조선 수군은 거북선(귀선) 3척을 포함하여 100여 척의 판옥선을 잃고 전면적인 패주를 함으로써 붕괴되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의를 띠고 있다.

 

우선 조선수군이 붕괴됨으로써 남해의 재해권이 넘어가 실질적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한위략에 적힌 일본군의 전과는 170척 수준으로

판옥선과 기타 선박(협선)을 포함 300척이 넘는 조선 수군의 규모를 생각하면 상당히 적은 규모로

일본은 칠천량 해전의 의미와는

별개로 자신들의 전과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완의 해소실기에는 이 때 조선 수군을 공격한 일본군 병력이

단 두 척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포로가 되었던 정기수 역시 소수 병력이 기습했는데 수군이 적이 많은 줄 알고 도주했다고 진술하였다.

(글출처: 위키백과사전,http://ko.wikipedia.org)

 

 

 

 

 

 

터키의 스포러스해협을 닮았다는 칠천도(七川島)

또한 멀리서 보면 한개의 섬이 7000개로 보인다고 칠천도라고 한다.

거제시에 딸린 60여개의 섬중에서

가장 큰 섬이라고 빨간머리앤님이 말씀해주신다...이 섬에는 거북선을 침몰한 거북선을 조사중이라고 한다.

우리 해전에서 아픔으로 기억되고 있는 칠천량...

하지만 담담히 받아들여야한다.

지금은 아프지만 내일을 위해서 더욱 국력을 키워야 할 이유가 되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