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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근교성지순례..한티선교성지에서 만난 가을빛

노루귀사랑 2011. 10. 23. 07:56

한.티.성.지

대구에서 북쪽으로 28Km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위치한 한티는 깊은 산골이다.

 

산줄기로 치면 팔공 산괴의 맥에 걸쳐져 있고 해발 600m를 넘는 이 심심 산골은 박해 때 교우들이 난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이다.

 

태백산맥의 보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팔공산, 가산, 유학산까지 이르는 팔공산괴는 칠곡, 대구, 경산, 영천, 군위의 5개 군에 걸쳐져 있으며,

그 장구한 산줄기의 배면을 동북에 돌리고

대구 분지에 전면을 두어 병풍과 같이 대구의 북쪽을 가리고 있다.  

 

팔공 산괴의 주봉에서 가산까지는 20km 정도로, 한티는 가산과 주봉인 팔공산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가산산성(사적 216호)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내지의 요새였다.

한티 역시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고향땅을 떠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유교의 전통이 강하였던 영남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신유박해(1801) 이후였다.

박해를 피해 서울,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의 신자들이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 상주 등으로 피난하여 신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잠시동안 외부와 격리된

이곳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중앙정부의 관여 없이

지방관에 의한 국지적인 박해인 을해박해(1815)때에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 등지의 많은 신자들이,

정해박해(1827)때에는 상주 지역의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끝까지 배교(背敎)하지 않고

굶주림과 온갖 고문의 역경 중에도 옥사하지 않은 신자들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이때 대구 감영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과 형제들이

그들과의 연락과 옥바라지를 위해

감옥과 비교적 가깝고 안전하다고 판단한 이곳 한티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글인용;한티성지 홈페이지에서)

신자들이 생계를 연명하거나 옥바라지를 위해 낮에는 사기를 구웠고

밤에는 인근 원당마을이나 신나무골로 성사를 보러 다녔다.

밤새워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로 옮겨 다녔기에 “천주교 신자들은 축지법을 쓴다.”는 말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한티에서 가장 먼저 순교한 교우는 이선이 엘리사벳과 아들 배 스테파노이다.

이들은 경신박해를 피해 신나무골에서 한티로 피난 왔다가 이곳에서 순교했다. 지금 이선이 엘리사벳은 신나무골로 옮겨져 안장돼있다.

 

 매주일 오전 11시에 한티순교성지 순례자의 집에서 주일미사가 있다.

매일 오전 7시에 평일미사를 본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 살던 김응진 가롤로(김현상의 차남) 가정과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및

 그의 숙부 서익순과 노곡동 송 씨 가정과 신나무골의 여러 신자들이 한티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그해 봄 문경 한실 서태순 베드로가 잡혀 상주 감영에 끌려갔다가 12월 19일 순교하니 조카 서상돈이 그 시신을 한티에 안장하였다.

1867년 박해가 잠잠해지는 듯하자

서익순과 이 알로이시오가 한티에서 대구로 내려가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절두산에서 백지사를 당하고 한강물에 던져져 순교한다.

1868년 음력 4월 17일에 독일인 옵페르트(Oppert)가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선참후계(先斬後啓)령을 내려 박해에 한층 더 박차를 가했다.

1868년 봄 한티에 포졸들이 들어와 재판과정도 없이 배교하지 않는 조 가롤로를 비롯한

30여 명의 신자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달아나는 신자들은 뒤따라가서 학살하였다고 한다.

 

 

포졸들이 물러가고 난 뒤 살아남은 신자들이 한티에 돌아와 보니 동네는 불타 없어지고

온 산 곳곳에 시신이 썩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썩어서 옮길 수조차 없었으므로 그 자리에 매장을 하였다고 한다(현재 한티의 순교자 묘역의 묘는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다).

 

한편 당시의 공소 회장이었던 조 가롤로와 부인 최 발바라와 그의 누이동생 조아기의 시신은 사기굴 바로 앞에 있던

그들의 밭에 나란히 묻었다.

그리하여 한티는 순교자들이 살던 신자촌이며

또한 그들이 처형을 당한 순교지였을 뿐 아니라 순교자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완전한 순교성지가 되었다.

 

 

 

 

한티 순교성지에는 모두 37기의 묘가 있다.

순교자 묘의 대부분인 33기는 무명순교자의 묘지이고 신원이 밝혀진 순교자의 묘는 4기이다.

신원이 밝혀진 순교자의 묘는......

조 가롤로와 부인 최 발바라와 그의 누이동생 조아기묘,서태순베드로의 묘이다.

 

 

 

 

 

 

▒ 순례자의 성당 ▒

 

 

▒ 성모마리아상 ▒

 

 

 

한티마을 옛공소

경상도지방에서 가장 오래 된 공소중의 하나이며 대구대교구의 초석이 된 공소이다.

대구초대주임신부인 김보록신부는

1882년에 한티공소에서 19명이 고백성사를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1998년 부활절에 옛공소를 복원하였다.

 

 

 

 

 

 

 

 

 

1997년에는 대구 대신학교 1학년 신학생들이 머무르며 공부하게 될

영성관을 착공하고 2000년 2월 17일 축성하기에 이른다.

한편 한티성지는 2000년 대희년을 맞아

대구대교구 대희년 전대사 순례성지로 지정되어 더욱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해부터 순교자 성월 대구대교구 지구별 한티 순교성지 순례미사가 봉헌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2004년 4월 13일에는

순례자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순례자의 집을 기공하여 같은 해 12월 10일 축복식을 거행했다.

 

 

 

 "우리뿐 아니라 우리의 후손 자자손손에게 이 값진 땅,

아름다운 신앙인이 살고 또 죽어서 묻힌 이곳을 더욱 은혜로운 땅으로 가꾸어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 문희 바울로대주교님 말씀 중에서...

 

 

▒ 피정의 집 ▒

천주교 대구대교구 한티순교성지(한티성지);경북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 5번지

 www.hant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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