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부벽루,진주 촉석루와 함께 3대명루로 손꼽히는 밀양 영남루
평양의 부벽루(浮碧樓),진주의 촉석루(矗石樓)와 함께 3대명루로 손꼽히는
영남루(嶺南樓)
소재지; 경남 밀양시 내일동 40번지(보물 제147호)
진주의 촉석루와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인 영남루는
밀양여행때마다 나에겐 뒷전이었다.
예전에 몇 번 들렀다는 마음에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했다.
새로이 재발견한
영남루는 내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단순한 선비의 고장..영화촬영지로만 인식되어 온 밀양은
단번에 나의 모든 것을 깨어놓고야 말았다.
김종직의 예림서원으로만 좋아했던 밀양은 영남루를 내어보이며 새로운 인식을 전환을 요구한다.
잠시 문화재청의 글을 인용해본다.
조선시대 밀양도호부 객사에 속했던 곳으로 손님을 맞거나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통일신라 때 있었던 영남사라는 절터에 지은 누로, 절 이름을 빌어 영남루라 불렀다.
그 뒤 여러 차례 고치고 전쟁으로 불탄 것을 다시 세웠는데
지금 건물은
조선 헌종 10년(1844) 밀양부사 이인재가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팔작지붕이다.
기둥은 높이가 높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넓게 잡아 매우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건물 서쪽면에서 침류각으로 내려가는 지붕은 높이차를 조정하여 층을 이루고 있는데 그 구성이 특이하다.
또한 건물 안쪽 윗부분에서 용 조각으로 장식한 건축 부재를 볼 수 있고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다.
▲ 추사체의 대가인
구한말 송파 하동주선생이 쓴 현판이다.
▲ 강좌용부(江左庸符)
낙동강의 왼쪽의 큰 고을이 아름답다란 글인것 같다.
▲ 교남명루(嶠南名樓)
새재이남에서 이름있는 누각이란 뜻인데 영남루를 일컫는 말이겠지.
▲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
당시 이인재부사의 아들 이증석이 11세(1843년)때 쓴 글씨라고 한다.
11세에 저리
멋진 글씨를 쓸 수 있었단 말인가?
대단하다.
▲ 영남루(嶺南樓)
밀양부사의 둘째아들인 이현석이 7세때 쓴 현판이란다.
뭐..이런 대단한 가문이 있을까?
영남루의 부속건물인 침류각으로 내려서는 계단은 가파르다.
계단마다의
지붕높이를 달리하여
밖에서 바라보면 계단식 지붕을 만날 수 있다.
그 모습이 수려하고 독특하다.
▲ 顯敞觀(현창관)
누각에 오르니 사방이 높게 나타난다.
▲ 강성여화((江城如畵)
응천강(凝川江)과 밀양읍성이 마치 그림과 같다.
능파당으로 걸음을 옮겨본다.
영남루의 누각이 더욱 멋지게 보이도록 만들어주는 능파당이다.
밀양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노라니
밀양부사가 왜 이 곳에다 다시 영남루를 세웠는지 알 만하다.
영남루경내와 주변에 산발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석화의 모습이다.
그 생김이 국화꽃모양을 닮았다.
납석이라고 하는데 청송의 꽃돌처럼 보인다.
▲ 천진궁(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17호)
요선관이 있있던 자리이다.
효종 3년(1652년)에 지었으며 공진관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조 15년(1739년)에 불탄 것을 영조 25년(1749)에 다시 지었으며
헌종 10년(1844)에 크게 수리하였다.
1952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 및 삼국의 시조왕, 고려 태조(재위 918∼943)의 위패를 모시면서
대덕전이라 하였으나
1957년에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글;문화재청)
새로이 발견하게 된 영남루...특히나 침류각으로 내려가는 층층계단과 통로는 무척 인상적이다.
다시 가게 될 영남루의 새로운 발견을 위해
내일의 밀양여행을 준비해본다.
1박2일의 행복한 밀양여행은 내게 새로움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