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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신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 된 영일냉수리신라비

노루귀사랑 2009. 9. 2. 21:39

 

 

영일냉수리신라비 소재지;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 342-1 신광면사무소 (국보 제 264호)

 

법광사지를 만나기 전에 살짝 신광면사무소에 들린다. 사전답사공부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들릴 수 있었을까?

동행을 해 주신 지인덕분에 신라비를 만날 수 있었다. 

 신라봉평비나 진흥왕순수비를 생각했는데 자그마한 모습에 살짝 실망을 했지만

내용을 알고는 금새 눈이 번뜩인다.

 

정식명칭은 영일냉수리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이다. 국보 제 264호이며 신라에서 제일 오래된 석비이다.

 아니다.

어제 보도를 보면 포항시 흥해읍 중성리 신라비가 가장 오래 된 신라비가 되었다.

503년에 만들어진.....

 

 

신광면 냉수리에 사는 주민 이상운 씨가 1989년 자기 밭에서 밭갈이를 하던 중 평소 걸림돌이 되어온 돌을 파서

가마니 짜는 짚을 두들기는 돌로 사용하기 위해

집으로 운반하여 두었다고 한다.

 

그 돌이 빗물에 씻기면서 글자가 새겨진 것이 확인되어 처음에는 귀중한 문화재를 이용하여

한 밑천을 잡기 위해 비밀리에

대구에 있는 대학 연구실을 통해 글 내용을 의뢰하였으나

대학에서 신통한 반응이 없어 이 비의 가치를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따돌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89년 4월 문화재청(당시는 문화재관리국)이 직접 발굴자를 설득하여 발견매장문화재로 신고되어

학계의 고증을 거쳐 그 가치가 인정되어 국보로 지정되었다고한다.

 

 

내용은 이러하다.

 "신라의 사부지왕(斯夫智王:실성왕?)·내지왕(乃智王:내물왕) 두왕이 진이마촌(珍而麻村:현재 돌막골로 불리고 있음)의

절거리(節居利)에게

재산 취득을 인정하는 교(敎)를 내렸다.

 

계미년(癸未年:503년?) 9월 25일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지증왕?) 등 일곱 사람의 각부대표(칠왕(七王):

사훼부(沙喙部)의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사덕지아우지(斯德智阿于支) 자숙지거벌우지(子宿智居伐于支),

훼부(喙部)의 이부지일우지(이夫智壹于支)·지심지거벌우지(只心智居伐于支),

 본피부(本彼部)의 두복지우지(頭腹智于支),

사피부(斯彼部)의 모사지우지(暮斯支于支))가 모여

중신회의 개최하고 전대의 두왕이 절거리에게 재물을 얻도록 왕교(王敎)를 내린 것을 의논하여 이를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그리고 별도의 교시(別敎)를 통해 절거리가 먼저 죽으면

그의 재산은 {아우인 아사노(弟兒斯奴) 혹은 아우의 아들인 사노(斯奴)}가 상속하게 되며

말추(末鄒)와 사신지(斯申支) 이 두 사람은 후에 재물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말것을 명령하였다. /

만약 또다시 문제를 일으키는 자에게는 중죄에 처할 것이다.

 

전사인(典事人) 7명은 일을 마치고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물어 이 사실을 기록한다./

촌주 두 사람(유지우지(臾支于支)·수지일금지(須支壹今智))이 이해의 일을 마치고 그 사실을 적는다. "라는 내용의 글을 새겼는데

 

비문에 나오는 "계미(癸未)"라는 간지(干支)와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등

각종 신분명칭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과 연관지어 볼 때

이 비의 건립연대는 신라 지증왕 4년인 503년으로 추정되나

학자들간의 이견(눌지왕 27년인 443년설)이 있어 좀더 구체적인 고증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자료발췌; http://blog.joins.com

 

 

형태는 네모난 자연석으로 밑부분이 넓고 위가 줄어드는 모습이며, 앞면과 뒷면, 그리고 윗면의 3면에 글자를 새겼다.

비문은 거의 닳지 않아 눈으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다.

글자는 총 231자이고 서체는 해서체로 보이나,

예서체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글씨체면에서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 울진봉평신라비(국보 제242호)와 매우 비슷하다. (자료;문화재청)


 

 

 

찾아가는길 경부고속도로-도동JC->대구-포항고속국도->포항IC->흥해방면(7번국도)->신광면사무소(냉수리신라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