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38대 원성왕의 괘릉
괘릉(掛陵) 소재지;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능리 산17 (사적 제26호)
오늘은 경주에서 왕릉을 보고 싶었다.
몇 분의 왕릉은 찾은적이 있지만 아직도 둘러 보지 못한 왕릉이 부지기수이다.
언제 시간이 된다면
신라의 왕릉을 다 찾아 다니고 싶다.
역시 주제만 달리 하면 우리나라는 볼 것이 너무 많다. 이래서 대한민국을 사랑한다.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능이라고 한다.
괘릉이란 뜻은 능을 걸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괘릉입구에 서 있는 석상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멋지다.
서역인의 형상을
한 무인상을 능 앞에 세웠다는건
이미 신라시대에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입증해주는것 같았다.
괘릉 석인상(보물 제1427호)
보물 제 1427호는 괘능의 석상및 석주를 통틀어 이른다.
문·무인 4점, 사자상 4점,
석주 2점으로 총10점이 모두 보물이다.
▲괘릉 문인상
문인상은 마치 중국인을 닮은것 같다. 당나라의 문인인가?
▲괘릉 사자상
네마리의 사자가 능의 앞쪽에 위치하고 있다.
대단하다. 왕릉의 크기도 그렇지만 주위에 호석을 두른 모습이 참 아름답다.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중 가장 완벽한 형태의 괘릉이다.
세련된 모습에 반한다.
괘릉의 무덤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둘레돌에 배치된 12지신상과 같은 세부적인 수법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이라고 한다.
특히나 괘릉의 12지신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는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된다.
무인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또한
자축인묘진사(子丑寅卯辰巳)의 6상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고 미신유술해(未申酉戌亥)의 5상은 왼쪽을 향하고 있다.
그럼 말은???
거의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원성왕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20대 후손으로 독서삼품과를 새로 설치하고 벽골제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의 보호를 위한 둘레석이 있는데, 이 돌에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양 옆으로
돌사자 한쌍·문인석 한쌍·무인석 한쌍과 무덤을 표시해주는 화표석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도 있다.(자료인용;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