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릉에는 아홉 왕이 계시지 않았다.
동구릉(東九陵)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사적 제1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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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의 햇살이 가득한 소나무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는
분명 동구릉에 묻힌 왕들이 주는 아름다운 선물이다.
한적하지만 왠지 위압감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동구릉은 조선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 일곱 왕과 열 명의 왕비가
50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잠들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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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소나무길을 따라 걸어가면 붉은 기운의 홍살문을 만난다.
황토길과 겸손한 야생화들,
그리고 하늘아래 고개숙인 아름드리 나무들이 왕릉과 조화하는 모습은
나의 마음을 겸손으로 여미게 하는듯 하다.
왕은 죽어 말이 없다....
그리고
같은 시대를 살아간 평민도 말이 없다....
그렇다고 무인석과 문인석,석수가 말이 있는것은 아니다.
추존왕 문조(文祖) 수릉
1890년(고종 27) 8월 30일 조성하였다.
문조(효명세자)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합장릉이다.
문석인과 무석인이 같은 공간에 배치된다.
이는 신분제도의 변화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상설제도는 국조상례보편에 따라
영조 때부터 따르게 되었다.
문종(文宗) 현릉
1452년(단종 즉위년) 9월 1일 조성하였다.
현릉에는 5대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가 잠들어 있다.
건원릉의 남동쪽에 현릉을 조성하였다.
능지를 정할 때에는 수양대군, 왕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의 대신을 비롯하여
풍수학랑관이 현지를 답사하고 정하였다.
그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승하하기 11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저멀리 홍살문이 보인다.
홍살문은 붉은 화살로 된 문이란 뜻이다.
사악한 기운을 막아 낸다는 의미로 세웠는데
왕릉이나 향교,서원등에 두 기둥을 세우고 삼지창을 꽂은 모습이다.
태조(太祖) 건원릉
1408년(태종8) 9월 9일 조성하였다.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봉분에는 다른 왕릉들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목릉으로 가는길에 홍살문을 만났다.
아마 제일 넓은듯 했다.
아주 깊숙히 숨어 있는 목릉...그 안에 있는 나도 목을 풀어 한참이나 숨어 있었다.^^*
▲ 계비 인목왕후 김씨 왕릉이다.
▲ 의인왕후 박씨 왕릉이다.
선조(宣祖) 목릉
1600년(선조 33) 12월 22일 조성하였다.
동구릉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목릉에는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세 사람이 잠들어 있다.
문인석의 문양이 아주 정교하다.
키도 얼마나 큰지.......올려다 보아야 했다.
선조의 능에는 3면의 곡장이 둘러져 있고,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여기에 난간석과 혼유석, 망주석 1쌍과 석양, 석호 2쌍이 배치되어
전형적인 상설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목릉의 능역은 원래 1600년(선조 33)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왕비릉인 유릉(裕陵)의 터로 정해진 곳이다.
1608년(광해군 즉위) 선조 승하 후 선조의 능인 목릉은 원래 건원릉의 서편에 조영되었는데,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1630년(인조 8) 현 위치로 천장되고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칭하여 목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 휘릉
1688년(숙종 14) 12월 16일
휘릉은 1688년(숙종 14) 조성된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이다.
숙종실록 14년 12월 15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장렬 왕후의 발인에 총호사(摠護使)가 재궁을 받들고
빈양문으로부터 명정전을 경유하여 나가서 진발하였는데,
모시고 따라간 문무 백관은 모두 걸어서 따르고 임금은 소여를 타고 흥인문 밖에까지 곡하며 따라가서,
노제소에서 절하고 하직하고 돌아왔다.
동구릉에는 가족단위 그리고 야유회가 많이 있었다.아름다운 숲속에서 나누는 정이 무척 깊어갈듯 하다.
예전에 소풍장소로도 많이 애용되었을것 같다.
영조(英祖) 원릉
1776년(정조 즉위) 7월 27일
1776년(정조 즉위) 3월 5일 영조가 승하하였다.
영조는 무려 52년에 이르는 긴 재위 기간 동안 여덟 차례에 걸쳐 산릉원을 조성하거나 천장하는 등
산릉제도에 관심이 컸다.
원비 정성왕후가 잠든 서오릉의 홍릉을 자신의 자리로 정해 쌍릉으로 조영하기를 바랐으나,
손자인 정조는 영조가 승하한 그 해 7월 27일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그를 안장하고 원릉이라고 했다.
헌종(憲宗) 경릉
1849년(철종 즉위) 10월 28일
경릉(景陵)은 세 개의 봉분이 나란히 있는 조선 왕릉 중 유일한 삼연릉 형태이다.
제일 우측의 능침이 헌종의 것이고, 가운데가 효현왕후 능침이며, 좌측이 계비 효정왕후 능침이다.
이는 우왕좌비의 원칙에 따른 것으로
중국 등과는 다르게 배치되어 있어 조선 왕릉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 혜릉
1718년(숙종 44) 경종의 비 단의왕후 심씨의 혜릉을 조성하였다.
단의왕후는 1718년(숙종 44) 2월 7일 소생이 없이 창덕궁 장춘헌에서 세자빈의 신분으로 승하하였다.
단의왕후가 승하 시에는 세자빈의 신분이었으므로,
원의 형식으로 단출하게 지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언제 가게 될까?
현종(顯宗) 숭릉
1674년(숙종 즉위) 12월 13일 조성하였다.
현종은 1674년(숙종 즉위) 8월 18일 34세로 창덕궁 대조전 양심각에서 승하하였다.
그 해 8도의 승군 2,650명을 징발하여 숭릉을 조영하였다.
언덕 위에 쌍릉으로 조영된 숭릉은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으로 연결되었고,
능침 앞에 혼유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곡장 안의 석양과 석호 각 2쌍과 망주석 1쌍이 초계를 이루었다.(자료;문화재청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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