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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를 제주 수학여행의 첫 코스로하면 어떨까?•─삶이 머문 여행/제주도*울릉도 2013. 5. 17. 14:12
삼별초의 마지막 보루였던 항파두리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
제주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1126-1외(사적 제396호)
제주도는 볼거리가 참 많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체험학습, 그리고 많은 박물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제주를 찾는다.
하지만 제주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박물관은 살아있다. 중문단지, 유리박물관, 한림공원, 협재해변등
다른 곳들은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과 일반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데 항몽유적지에는 사람들이 아예 없다.
그만큼 역사에 관심이 없다는 얘기다.
나 역시 예전에 제주도 이도동에 있는 귤림서원의 찾기 위해 걸음을 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는 나 역시 제주의 역사에 대해서 조금 소홀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조금 부끄러운 마음을 부축해서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에 들린다.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은 고려 원종 11년(1270) 2월
고려 조정이 몽고군과 강화를 맺고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맞서 고려 김방경과 몽고의 흔도가 이끄는
여몽연합군에 최후까지 항쟁하다 원종 14년(1273) 전원 순의한 삼별초의 마지막 보루였던 곳이다.
당시에 쌓았던 토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돌쩌귀, 기와, 자기, 연못터, 장수물, 구시물, 옹성물, 살 맞은 돌 등 많은 유적이 발견되었고,
주요 시설로는 관리사무소,
휴게소, 전시관, 순의문, 순의비를 두고 있다.
입장료는 500원이다.
제주도민은 그냥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구.....ㅎ
유물전시장은 고려 삼별초군이 1271년 제주도에 입도(入島)하여
1273년 항앶이 끝날때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로 항파두성 주위에서 발견 순의문앞에 전시된
돌쩌귀와 더불어 이 곳에 전시하게 되었다.
삼별초군이 강화도, 진도를 거쳐 제주도 입성까지
의,식,주에 관계된 많은 물건이
700여년이 지난 지금 당시에 사용되었던 무기류,의류,문서등은 소실되어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기와류, 돌쩌귀,자기파편등 석기, 자기류가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건물의 크기,생활상을 엿볼수 있다.
이 성은 해발 약 190∼215m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고성천이 있고 서쪽으로는 소왕천이 있다.
지형은 남고북저를 하고 있는데,
북쪽인 경우 토성부근이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동쪽은 완만하나 서쪽은 단애를 이루는 하천을 두고 있어 성을 쌓기에는 천연적으로 적합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인 토질은 자갈이 약간 함유된 황갈색 토양으로 이뤄졌고,
찰기가 아주 강하기 때문에 토성을 쌓기에는 적합한 성질은 띤 토양이라 할 수 있다.
김통정 장군은
적의 상륙 예상지인 함덕포와 명월포의 지세를 고려하여
그 중간지역인 항파두리에 둘레 15리에 달하는 토성을 쌓고 성내에 건물을 짓고 삼별초의 근거지를 마련했다.
여몽연합군과 대항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글인용; 문화재청, 제주시청,다음 자연박물관)삼별초는 고려군의 정예 별동부대로서
고려 원종 11년(1270) 2월 고려조정이 몽고군과 강화를 맺자 이에 반대하여 끝까지 반몽항쟁을 계속하였는데,
전라도 진도로 근거지를 옮겼다가
그곳에서 크게 패하자
이 곳 제주도로 건너와 항파두성을 쌓고 몽고군과 대결하기 2년여만에
마침내 원종 14년(1273) 4월 28일 여.몽군 군선 160척과 약 1만에 달하는 병력에 의해 전원이 순의하고 말았다.
항파두리성이 함락되기 직전,
김통정장군을 중심으로 한 70여 명은 성을 탈출해 한라산으로 숨고, 일부는 여·몽연합군에게 항복한다.
이러니 어찌 제대로 된 전쟁을 치룰 수 있겠는가?
여·몽연합군은 개경에서 출발한 지 20일 만에 성안으로 진입한다.
여·몽군은 삼별초의 지휘부를 붙잡아 6명을 공개처형하고 35명은 포로로 하는 한편 항복한 삼별초의 사졸 1,300명을 포로로 붙잡아 귀환시킨다.
지휘부의 35명은 귀환 도중 나주에서 참수했다.
한라산으로 들어간 김통정은 목매어 자결하고, 그를 따르던 70여 명도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로써 3여 년 동안 이어진 제주삼별초의 항몽활동은 종식되고 제주는 몽골이 직접 관리하는 직할령이 되었다.
오늘도 한라산 어느 계곡에는
외적의 침략앞에 굴복할 줄 모르던 고려무인의 필사항전의 결의가 살아 전하고 있다.
삼별초군을 평정시킨 몽골군은 병력을 철수하기는커녕 다루가치총관부를 설치하고
군사를 주둔시켜 제주도를
몽골의 직속령으로 만들어 1세기 동안 지배하였다.
몽골이 지배하는 동안 제주도에서는 수많은 공물을 해마다 바쳤으며,
몽골의 일본정벌을 위한 준비로 목마장을 설치하여 군차마를 기르고, 산야의 나무를 베어 함선을 건조하는 등
이 어려운 군역에 제주도민들이 동원되어 수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몽골의 목마를 관리하기 위해 제주도에 투입되었던 목호들은 원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그대로 남아 갖은 패악을 저질렀으며
심지어 고려의 사절이나 제주 목사를 살해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공민왕 23년 8월 고려는 마침내 최영장군을 삼도도통사로 삼아 몽골세력을 토벌하게 하였으니
최영장군은 전함 3백 14척에 2만 5천의
대군단을 이끌고 상륙하여
명월진에서 3천여기의 몽골군을 격멸하고, 밤섬까지 쫒겨 들어간 수괴들을 섬멸하여 1세기에 걸친 몽골의 침략을 종식시켰다.
△ 조록나무
조록나무목(─目 Hamamelidales)에 속하는 과.
관목과 교목으로 된 23속(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온대와 열대 지역이 원산지이다.
일찍 피는 꽃과 단풍의 색깔로 유명한 풍년화류, 히어리류, 포테르길라속(Fothergilla) 식물과 풍나무류 등이 이에 속하는데,
이들은 비교적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다.
항몽순의비는 몽고군에 대항해
최후를 맞이한 삼별초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석으로비석 전면의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란 제자(題字)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항파두리에 얽힌 전설하나.....ㅎ
김통정장군이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 성에서 뛰어 내리면서 밟은 돌에 발자국이 생기고
발자욱이 생긴 그 곳에서 물이 솟아
나온다는 '장수물'과
삼별초군이 활쏘기를 연습할 때 화살을 맞아 자국이 생겼다는 '살 맞은 돌'등 여러가지 전설들이 생생하게 전해오고 있다.
△ 담팥수
담팔수과(膽八樹科 Elaeocarpaceae)에 속하는 상록관목.
키가 약 20m까지 자란다. 잎은 어긋나지만 때때로 모여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팽나무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 앞에 서 있는 팽나무 아래의
돌쩌귀는 삼별초군이 항파두성 성문의 밑틀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춧돌이다.
항파두성에는 네 개의 성문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 돌쩌귀 10기가 보존되어 있다.
△ 굴거리나무
대극과(大戟科 Euphorbiaceae)에 속하는 상록교목.
남쪽 지방에서 자라는데 바닷가로는 충청남도 안면도까지, 육지로는 전라북도 내장산까지 올라와 자란다.
어린 가지는 붉은 빛이 도는데, 자라면서 초록색을 띤다.
고려 무인의 드높은 기상을 느낄 수 있는 항파두성이다.
진도 용장산성(현 남도석성)의 배중손 장군과 항파두성의 김통정 장군은 고려의 무인중의 무인이었다.
그 고결하고 순수한 역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바란다.
삼별초군의 마지막 보루 항파두성을
제주여행에서 놓치지 말고 꼭 한 번 찾아보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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