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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미가 돋보이는 운현궁•─삶이 머문 여행 2013. 1. 27. 23:13
늘 가고 싶었던 운현궁!!!
모처럼만의 서울여행으로 이번에는 들리게 되었다.
어떤 이유일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운현궁은 웬지 마음에 안식처럼 느껴졌던 곳이다.
일단 운현궁하면 흥선대원군이 생각이 난다.
그리고 이 곳에서 전국의 서원들을 철폐했던 그 순간들의 추상같은 얼굴이 오버랩되기도 하는 곳이다.
일단은 운현궁에 들어선다.
입장료는 700원이지만 평일 12~1시까지는 무료이다.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로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며,
한국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흥선군 이하응이 왕실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이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였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크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다.
고종이 12살까지 살았던 운현궁은
철종 때 옛 관상감 터였던 운현궁에 왕기가 있다는 내용의 민요가 항간에 유행하였으며,
고종이 등극한 후 대원군이 운현궁 터를 다시 확장하였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서운관(書雲觀)이 있는 그 앞의 고개 이름이었으며, 서운관은 세조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그대로 통용되었다.
서운관의 명칭인 운관(雲觀)과
운관 앞의 고개를 가리키는 운현(雲峴)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 수직사
운현궁 정문 오른쪽에 있는 행각으로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 업무를 맡은 이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부터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고,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경호가 필요해지자 궁에서 경비병이 파견되고, 관리인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현재 수직사의 방 안에
화로·가구·호롱불 등의 생활용품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고종의 잠저는 당시 대왕대비 교지를 받들어
영의정 김좌근, 도승지 민치상, 기사관 박해철·김병익 등 일행이 명복(明福-고종의 이름)에게 익종의 대통을 계승토록 하기 위하여
고종을 맞이하러 최상급의 가마행렬을 갖추어 관현(觀峴)의 흥선군 사저에 갔을 때
흥선군의 위엄 있는 자세와 그의 둘째 아들인
명복의 천진스러웠던 모습에 대한 사실적 묘사에서 운현궁이 고종의 잠저였음을 알 수 있다.
△ 난초를 그리고 있는 흥선 대원군
△ 관복을 입은 흥선대원군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가 임오군란 당시 청에 납치되었다가 환국한 이후 민씨 척족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유배되다시피 은둔생활을 한 곳이 이 건물이고,
만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
노안당은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노안당의 상량문이 1994년 5월 27일 보수공사 당시 발견되었는데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 및 지위에 관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상량문에 의하면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殿下)'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閤下)'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또 노안당의 당호는 공자가 '老者를 安之하며'라고 한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노락당과 노안당 증축 당시 대원군의 권세를 이처럼 상량문에서도 잘 대변하고 있다.
노안당은 1864년에 노락당(老樂堂)과 함께 지었으며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이며 처마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을 단 수법은 그 시대적 특징이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는 궁궐에 비하여 손색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였다.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했던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에게 '노락당기(老樂堂記)'를 지어 기념할 것을 지시했던
사실만으로도 노락당이 상징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병학은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 된다고 했는데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해도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천하제일이었다는 것을 잘 웅변하고 있다.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운현궁을 유지·관리하는 일은 소유권에 관계없이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계속 맡아했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된 것은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였다.
이후 그 소유권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정부와 대원군 후손 사이에 법적 공방이 있었으나
그 해 9월 21일 결국 대원군의 5대손 이청(李淸, 1936- )씨에게 운현궁 소유권이 확정되었다.
그러던 것이 1991년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면서양도 의사를 이청씨가 밝힘에 따라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되었고, 1993년 12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된 것이다.
(글,일부사진인용; 운현궁홈페이지,http://www.unhyeongung.or.kr,문화재청)
이노당(二老堂)
이노당은 운현궁의 가장 왼쪽에 위치한 건물로 노락당과 더불어
안채의 기능을 담당하였던 건물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치러진 노락당을 안채로 사용하기 어려워지자, 새로운 안채로 1869년에 이노당을 짓게 되었다.
주로 여성들이 거주하며 살림하던 공간이기 때문에 남자들이 쉽게 드나들지 못하도록 'ㅁ'자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정면 7칸, 측면 7칸 규모이다.
▲ 열강의 각국 공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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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궁의 일부가
덕성여자덕성여대 평생교육관으로 사용된다.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이 일본사람들의 손을 빌려 지은 운현궁 양관이다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도 헐려 나가고 영화루와 은신군·남연군의 사당도 모두 없어졌다.
조용한 시간도시에서 만나는 운현궁......
그 작은 공간에도 봄이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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